부산의 겨울은 바다 위에서 마른다

A vibrant display of fresh fish on ice at a seafood market, highlighting marine bounty.

부산의 겨울은 바다 위에서 마른다

겨울 초입, 바람이 한결 차가워질 때쯤이면 부산 바다는 조금 달라진다. 햇살은 낮게 깔리고, 부두 쪽에는 길게 매달린 무언가들이 흔들린다. 누군가에겐 그냥 생선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겐 그게 계절의 냄새다. 바로 과메기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 냄새를 좋아했다. 생선 비린내가 아니라, 바다가 식어가는 냄새 같았다. 남포동 근처 자갈치시장에 가면, 바람 따라 휘날리는 과메기 더미들 사이로 장갑 낀 손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말리지 않으면 썩는다

부산 사람들에게 과메기는 음식이기 전에, 기다림이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생선들을 줄줄이 엮어서 걸어둔다. 낮에는 햇살이 말리고, 밤에는 바람이 스친다. 그렇게 여러 날 동안 물기가 빠지고 살이 탱탱하게 마르면, 그제야 하나의 ‘과메기’가 된다.

그걸 보며 항상 느꼈다. 사람도, 관계도, 감정도 — 말리지 않으면 썩는다는 걸.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겨울의 소리, 그리고 손끝의 온기

자갈치시장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묘하게 규칙적이다. 비닐장갑이 비닐봉지를 스치는 소리, 칼이 생선 살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상인들의 짧은 웃음. 그런 일상의 리듬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부산의 겨울은 그렇게 살아 있다. 사람과 바다 사이 어딘가에서.

그 소리들을 들으며 문득 떠오른다. 어머니가 겨울 저녁에 상 위에 올리던 과메기 접시. 초장, 마늘, 그리고 김 한 장. 그 단순한 조합이 어쩐지 세상에서 제일 따뜻했다.

과메기, 부산의 또 다른 얼굴

포항이 과메기의 본고장이라면, 부산은 그 맛을 가장 섬세하게 이어받은 도시다. 영도나 기장 쪽에도 과메기를 직접 말리는 풍경이 종종 보인다. 여전히 수작업으로, 바람을 믿고, 시간에 맡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음식이다.

그게 좋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 조금 비뚤고 들쭉한 모양의 과메기들이 오히려 진짜처럼 느껴진다. 세상엔 그런 게 많다. 완벽함보다 진심이 더 맛있다.

부산 바다의 냄새를 닮은 음식

부산의 과메기는 짠 바람의 냄새를 닮았다. 부산시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해양 특산물로 과메기를 자주 소개한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불포화지방산이 많아 겨울철 건강식으로 좋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 그런 영양학적 설명보다, 나는 그냥 그 짠내가 좋다. 사람 사는 냄새랑 닮았으니까.

겨울이 다가올 때마다 생각나는 얼굴들

요즘은 바다에 잘 가지 않는다. 일도 많고, 세상도 복잡하고, 마음도 쉽게 식는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꼭 생각난다. 그 시장의 냄새, 그 바람의 감촉, 그리고 과메기를 건네던 상인의 웃음. 그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내 기억 속의 부산이다.

지금도 가끔 시장을 걷는다. 낡은 스티로폼 박스 위에 쌓인 생선들, 손에 든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 모든 게 묘하게 어울린다. 삶이란 게 꼭 그런 것 같다. 뜨겁게 구워지기보단, 바람 맞으며 서서히 마르는 것.

말라간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과메기를 잘 모른다. 냄새가 세다고 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냄새가 좋다. 생선이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변하는 냄새 — 그건 부패가 아니라 성숙이다. 삶도 그렇지 않나. 아픈 시간을 지나야 깊은 맛이 난다.

바람에 흔들리는 과메기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지금, 어쩌면 마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건조되지 않게, 너무 늦게 썩지 않게, 딱 좋은 온도로 말려가는 중.

바다와 사람, 그리고 기다림의 미학

부산의 바다는 늘 기다림의 도시다. 파도는 오고 가고, 사람은 떠나고 돌아온다. 과메기도 그 기다림의 결과물이다. 급하게 굽지도, 끓이지도 않고, 바람에 맡긴다. 그게 과메기의 철학이다.

요즘은 온라인으로도 과메기를 쉽게 주문할 수 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같은 곳에서 ‘부산 과메기’라고 검색하면 여러 상점이 나온다. 냉동 포장도 잘 되어 있고, 배송도 빠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장에서 사는 걸 좋아한다. 포장 안 된 냄새, 거친 손끝, 그게 좋다.

바람이 만든 음식, 사람이 만든 이야기

과메기는 기술이 아니라 정성으로 완성된다. 이틀, 삼일, 아니 일주일. 바람이 다르고, 햇살이 다르고, 손길이 다르다. 그렇게 말린 한 점을 입에 넣으면, 단순한 생선이 아니라 ‘시간의 맛’이 난다.

그 맛을 느끼면 알게 된다. 부산의 겨울은 단순히 춥지 않다는 걸. 그 안에는 따뜻함이 있다. 바람 속에서도 살아 있는 온기. 말라가며 더 단단해지는 삶의 맛.

끝으로, 이 계절의 냄새에 대하여

사람마다 겨울의 냄새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난로 냄새, 어떤 사람은 귤 껍질 냄새, 나에게는 과메기의 냄새다. 그 짭짤한 바람, 그 느릿한 건조, 그 사이로 스며드는 기억들. 부산의 겨울은 늘 그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과메기를 산다. 마늘 한 쪽, 김 한 장, 그리고 초장 한 숟갈. 그 한입에 지난 시간들이 스민다. 그건 음식이 아니라, 나의 계절이다.

KBS 뉴스에서 본 적 있다. 어떤 노인이 포항에서 50년째 과메기를 말린다고 했다. 그 말이 떠오른다. “바람이 다 해줍니다.” 그게 참 좋았다. 부산의 겨울도, 아마 바람이 다 해주는 걸 거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간다. 말라가는 바다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과메기처럼, 조금은 비틀리고, 그러나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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